책을 읽은 뒤의 소감을 말하자면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글 번역본으로 읽을 책이 아니라고 느꼈고, 제가 만약 영어 책을 읽을 정도로 영어가 수월해서 영어 원문으로 읽었다면 소감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두 권의 책에는 상당히 많고 다양한 언어유희가 나오는데, 이를 적절히 번역하기엔 내용 자체가 달라져서인지 직역하고 밑에 각주로 설명하는 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용 이해를 위해서는 계속 책 밑부분으로 내려가 각주를 봐야했고, 그래서 무슨 농담인지 알아듣는것도 늦어졌고, 흐름과 맥이 끊겨 그 맛이 흐려졌습니다.
이상한나라는 트럼프, 거울나라는 체스를 배경으로 하고있고, 이 세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중간중간 들어가있는 삽화들은 내용 이해 및 등장인물의 생김새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때 그려지는 일부 삽화가 생각보다 무섭게 그려져있어서 놀랐는데, 아이들이 보면 공포를 느낄것같은 그림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앨리스가 음료와 케이크를 먹으면서 작아지고 커지기를 반복할 때 목만 길어지는 장면, 재버워키의 삽화 등 기괴하고 이상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앨리스의 엉뚱한 모습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어울리는 작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책 자체의 이야기구조가 생각보다 정신없었습니다. 읽다보니 같이 정신이 나가는 기분이었는데, 뭔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정석적인 구조를 통해 직선으로 나아갔다면 앨리스 시리즈는 정신없이 이곳저곳 왔다갔다하면서 흘러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장면들이 모자장수, 토끼, 겨울잠쥐의 다과회와 그리핀, 가짜거북의 대화였습니다. 뭔가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아닌 각자 할말을 하는데 얻어걸려서 대화가 되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엔딩도 너무 갑작스럽게 끝났는데,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에서는 트럼프카드들에게 공격받다가 꿈에서 깨는 방식으로,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는 붉은여왕을 집어들었다가 고양이로 변하면서 꿈에서 깨는 방식으로 끝났습니다. 앨리스의 모험이 꿈이라는 결말은 좀 허무했는데, 지금이야 뻔하고 허무한 결말이지만 그 때 당시로선 센세이셔널 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스토리는 영화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처럼 집으로 돌아간다거나 누굴 죽여야한다거나 등 확실한 목표가 없이 흘러갔습니다. 뭔가 정돈되어있지 않다고까지 느꼈는데, 아마 제가 아직 책을 많이 안읽어봐서 그 은유나 비유들을 파악하지 못해서인것 같습니다. 반면 거울나라의 앨리스 스토리는 8번째 칸까지 도달해서 여왕이 되고 싶다는 목표라 부를 만한 것이 있어서 전작보다 괜찮았습니다. 물론 어린 소녀인 앨리스의 시선에 따라 흘러가는 스토리는 정신없으면서도 작품에 어울렸습니다. 특히 스토리 전체가 앨리스의 꿈인 만큼, 개연성없고 두서없는 꿈이라는 요소를 잘 담아낸게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또한 앨리스는 많이 울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하는데, 이러한 솔직한 행동들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면서 다음 스토리로 이어지는 것 역시 좋았습니다.
영화에서의 인상이 강해서그런지 아니면 게임에서 알게된 이 존재에 대한 의문과 기대감 때문인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재버워키'라는 시가 등장했을 때 매우 반가웠습니다. 재버워키라는 시가 뭔가를 숨겨놓은것처럼 적혀있어서 이 비밀이 밝혀지는것도 기대되었고, 캐릭터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기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버워키는 단순히 시로만 언급되고, 험프티덤프티에 의해 해석된 이후로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험프티덤프티가 해석해준 내용까지도 이해가 안되어서 살짝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Rodeo Stamped라는 게임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재버울피에 대한 시는 어떤 단락의 패러디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게임 Rodeo Stamped의 번역은 잘 되어있는 편은 아니라서 영어 원문을 찾아봤어야 했고, 찾아본 결과 매우 비슷한 단락이 존재했습니다.
게임 로데오 스탬피드에서의 패러디는
"Through and through, the gold lasso went snicker-snack!
You mand a friend, and in the end came galloping back."
이었고, 원작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온 재버워키 시는
"Through and through, the vorpal blade wnet snicker-snack!
He left it dead, and with its head he went galumphing back."
으로,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원작의 시에서는 '재버워키를 죽이고 돌아온 소년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면, 게임에서는 오히려 '재버울피를 길들여 친구가 되어 돌아온 소년'의 이야기로 패러디한 것이었습니다. 동물들의 등에서 로데오를 하며 길들이는 게임에 딱 맞는 적절하고 재밌는 패러디였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시리즈를 읽고 나서 팀버튼 감독의 영화 '이상한나라의 앨리스'를 감상하니 오히려 영화판의 재미가 더 늘어났습니다. 영화만 봤을 때는 그저 그랬고, 책은 오히려 실망스러웠는데, 책의 내용과 디테일들을 알고 영화를 보니까 더 인상깊었습니다. 가령 하얀 장미를 불만스러워하는 예비 장모에게 '빨갛게 칠하면 되죠'라고 답하는 앨리스의 모습이라던가(원작에서 붉은여왕에게 참수당하지 않기 위해 흰 장미를 붉게 칠하는 병사들이 등장),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시 '재버워키'에 등장하는 이름들인 '쩝쩝새', '밴더스내치', '재버워키'까지 붉은 여왕을 섬기는 괴물들로 나온다던가(각각 거대한 맹금류, 거대한 맹수, 거대한 용과 같은 괴수로 등장), 붉은 여왕 세력은 트럼프카드를 모티브로, 하얀 여왕의 세력은 체스를 모티브로 각각 묘사된다거나,(원작 책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의 배경은 트럼프카드,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배경은 체스판), 마지막으로 재버워키에 맞서기 직전 6가지 불가능한 일을 떠올리는 앨리스의 모습(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하얀 여왕이 앨리스에게 아침 식사 전 6가지 불가능한 것들을 믿어보기로 했다는 대사가 존재) 등 원작을 알면 더 재밌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인 흐름 역시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계속 '그 앨리스가 아니야', '잘못된 앨리스를 데려온거야'라며 의미심장한 복선들을 남깁니다. 그리고 회수되는 복선들과 반전요소가 압권이었는데, 책에서는 꿈으로 이야기가 끝났지만 사실 이는 앨리스가 직접 이상한 나라와 왔던 것이며, 이 사실을 까먹고 꿈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화판의 스토리를 다시 보니 개인적으로 허무하게 느꼈던 꿈으로 끝나는 결말도 만족스럽게 채워지고 더 감동적으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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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 : ★★☆(5/10)
신비한 세상에서의 모험이라는 큰 이야기 틀, 많은 미디어 매체들에 영향을 끼친 영향력 등은 좋았지만 번역판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언어유희들과 정신없는 구조는 개인적으로 불호였습니다.